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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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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주 댓글 10건 조회 1,861회 작성일 04-09-0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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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의 하루 일과는 너무나도 바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유리창을 닦고. 커텐을 세탁하고. 화분을 이리저리 옮겨놓고, 먼지가 쌓인 꽃나무는 화장실로 옮겨 물을 뿌려주고, 추위를 이기지 못하는 꽃은 마루와 창가에 그리고 다락에 올려놓고 보살펴야 하고, 또 어떤 꽃에 물을 주어야 할지를 살피며, 쳐다보고 쓰다듬고 사랑을 나눠 주다보면 어느새 하루해는 붉은 물감을 풀며 저녁을 지난다.
지난 여름이다.
분갈이를 해주기 위해 흙을 얻으러 야외로 나갔다. 마침 마늘을 캐고 난 빈 밭이 있어 푸대에 흙을 퍼 담았다. 그런데 아주머니 한 분이 일하다 말고 마을로 바쁘게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잠시 후 그 아주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달려나오더니 "거름을 준 흙을 파가면 다음 농사는 어떻게 되느냐?" 농사를 못 짓게 됐다며 금시라도 경찰을 부를 기세였다. 졸지에 도둑질을 하다 붙잡힌 꼴이 되었다. 다급 한대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 후 돌아온 일이 있었다. 사실 도시 사람들한테는 보잘것 없는 한줌의 흙일지언정 농사꾼한테는 제살부치보다 소중히 여기듯 내 꽃들도 그 소중한 흙을 보듬으며 봄부터 내 뜰 안에 수많은 꽃무늬를 놓아주었다.
앞 베란다에, 계단에, 앞마당에, 수돗가에서...
2월이면 피기 시작해서 흰눈이 오기까지 끊임없이 피어나는 꽃들 그 꽃들 중 얼어붙은 땅을 헤집고 피어나는 연분홍 노루귀에서부터 시작해서 봄꽃이 지고. 여름장마에만 피는 샤프란, 가을이 오면 흰구절초가 만발하고, 눈이오면 더 이상 피지 못하는 빨간 장미로 하여 꽃피는 1년을 마무리한다.
양평이 고향인 나는 들꽃, 특히 야생화를 좋아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볼품 없는 우산나물과 족도리풀을 애지중지 사랑한다. 또 끊임없이 꽃을 피워내는 초롱꽃을 사랑한다. 이 꽃은 꽃피는 동안이 처음 보름이고 또 보름 후에 다시 꽃이 핀다. 우리 집에 있는 초롱꽃은 네 대궁에서 가지를 치며 꽃을 피운다. 하두 꽃을 많이 피길래 세어보았다. 백 개를 세고 나서는 숫자를 잊지 않기 위해 원추리 꽃잎을 하나 꽂아두면서 세니 많이 필 때는 하루에 삼백 송이가 넘기도 했다. 이렇게 보름 동안에 천여송이가 피었다. 또 지는 꽃잎을 따주면 보름 후에 다시 새 꽃을 천여 송이 피워내는 꽃. 그 꽃이 초롱꽃이다.
나는 작약꽃과 목단꽃도 좋아한다. 잎이 나면서 꽃을 물고 나오는 꽃. 그렇게 크다가 어느 날 개화를 하면 닷새만에 떨어지고 마는 꽃. 그 긴 날을 어제도 오늘도 많이도 기다렸지만 피고 나면 닷새만에 그냥 지고 만다. 너무나 아쉬워 사진 속에 담아도 봤지만 허망함을 달랠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꽃은 나를 안타깝게 한다.
어느 날 대공원에서 우리꽃 박람회가 열렸다. 나는 처음으로 큰꽃으아리를 보았다. 잎이나 줄기는 보잘 것 없는데 꽃은 그렇지가 않았다. 흰접시 모양인데, 여덟 개의 커다란 꽃잎으로 어우러진 꽃은 너무나도 우아하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내 나이가 적지 않건만 아직까지 한번도 그렇게 우아한 꽃을 본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꽃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멋있는 꽃. 큰꽃으아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어느 날 친구들과 청계산에 꽃놀이를 갔었다. 맑은 날씨 청명한 하늘에 걸맞게 이름도 청계산이었다. 녹음을 감돌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에 올라 어린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천둥 번개까지 치면서 사방이 어두웠다. 어디가 어디인지 조차 모를 만큼 숲 속은 캄캄했다.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요란하게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찌찌찍 소리를 내며 산을 가르며 지나갈 때 숲이 갑자기 형체를 드러내는데 순간 큰꽃으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며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너무나 벅찬 마음에 비가 오는지 날이 어두워지는지도 모르고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남편의 전화였다. "지금 어디 있느냐? 동네는 지금 비가 많이 온다. 언제 오느냐" 남편의 전화를 건성으로 받고 다시 으아리꽃을 살펴보았다. 이리저리 다른 나무위로 넝쿨을 만들어 의지하면서 피는 꽃. 그 소박하고 우아한 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막히는 것 같던 감회를 느낀다.
이제 그 꽃들을 향해 찬바람이 불어온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꽃들을 화분에 그냥 놔두면 얼어죽을 것 같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용기를 내어 앞 베란다에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적벽돌로 세로 3장 가로 10장 길이에 7퀘를 올려 작은 화단을 만들어 흙을 채워 겨울을 날 수 있는 꽃들은 그곳에 심었다. 그 작은 꽃밭에 옮겨 심을 꽃은 너무 많은 것 같다. 오밀조밀 꼭 흥부네 식구들 같다. 그러나 난 기다린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초롱꽃과 수선화, 얼레지, 돌단풍, 두루미 천남성, 튜립, 개불알꽃, 둥굴레, 매발톱, 족두리꽃, 현호색, 무스카리, 노루귀, 자란 등 200여개의 화분에서 자라던 꽃들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꽃 심은 자리마다 이름표를 꽂아두었다. 그래야 그 곳에 다른 꽃을 심지 않을 테니까...
또, 앞마당 화단에는 화분에서 키우던 피나물과 애기똥나물과 동의나물을 심었는데 내년 봄에 다시 나올지. 피나물은 노오란 물이 똑 떨어질 만큼 강렬하게 피어나 때론 나를 놀라게 한다. 나무줄기를 자르면 줄기에서 노란물이 나오는데 노란물을 볼 때마다 이름을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 피나물이 필 때는 민들레, 제비꽃도 함께 핀다. 그 노오란 꽃들은 잔디마져 싹트지 않는 이른봄에 제일 먼저 인사한다.
그랬다. 그 옛날 내가 시골서 지내던 어느 날 겨울, 아버지께서는 산에서 나무를 해 오셨다. 아버지의 지게에는 청솔가지 사이에 진달래 가지도 섞여 있었다. 아마 시골에 사셨던 분들은 아실 것이다.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넣고 불을 때면 부엌이 연기로 가득차 곰을 잡는다고 했다. 그때는 옆에 계시는 어머니도 안보일 정도이니까.
그 어릴 때도 그리고 커서 사춘기가 됐을 때도 언제나 내 작은 방에는 흰색인지 분홍색인지 늘 진달래꽃이 책상위 작은 항아리에 꽂혀 있었다. 그것이 내 어린 시절의 봄맞이다. 아무것도 없는 추운 겨울날에도 내 방에서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꽃을 피우곤 했었다. 그리고 앞산에 진달래가 온통 수를 놓을 때에야 내 방에서는 꽃이 사라지곤 했다. 어릴때 우리 집은 남쪽을 향해 있었는데 왠지 진달래는 꼭 북쪽에서만 꽃이 펴서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 꽃이 지면 꽃잎을 따서 앞마당에 땅을 파서 그 속에 꽃잎을 넣고 위를 유리로 올려놓았다. 봄의 설레임을 묻으면서 그러면서 놀았다.
붉은 오색의 단풍이 들 때 또 다시 나는 가랑머리 앳띤 소녀가 된다. 앞에 관악산이 있고 뒤에 보라매공원이 있지만 가을이면 왠지 나는 코스모스가 더 보고싶어진다. 여지껏 잊고 지내던 덕수궁에 은행나무가 보고싶고 단풍놀이를 떠나고 싶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시골풍경에 젖고 싶어진다. 이 시기에 찾아오는 설렘은 단풍이 떨어져 흰눈이 오면서 끝이 난다. 비록 잠시 동안에 일어난 일일지라도 내게는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유별난 가을을 맞이하며 보낸다. 내 나이 50인데....
네 대궁으로 수천 송이를 피어내는 초롱꽃을 보니 그 옛날 일흔이신 친정아버지께서 '마음은 늘 스무 살인데'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2000 10 19







댓글목록

김은주님의 댓글

김은주 작성일

  양섭님의 가을병을 보다가 제 가을병을 옮겨봅니다.

지길영님의 댓글

지길영 작성일

  스무살의 은곡님, 야생초 일기를 보는듯 했어요. 어쩌면 감수성이...., 5학년 아줌마 맞아요? 부럽습니다.~^^*

이양섭님의 댓글

이양섭 작성일

  은주님 스므살이나 ?? 내는 18세 밖에 안되었는뎅 헤헤헹  내 보기에는 은주님은 영원한 소녀같습니당      "사랑해요"^&^

김용환님의 댓글

김용환 작성일

  늘푸른 마음을 항상 간직하시기를!!!

최명순님의 댓글

최명순 작성일

  넘넘 멋진 마음 함께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김정림님의 댓글

김정림 작성일

  야생초 일기 잘 보았습니다.머리속으론 꽃을 보구요. 일년이 금방 지난 듯 합니다~~잉~잉 물어냉 한살 더 먹었나 봐~~^^

이옥경님의 댓글

이옥경 작성일

  동감하는 부분도 있고, 아름다운 어린시절이 부럽기도 하고 김은주님의 마음이 제마음속에 깊숙이 파고드네요.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꼬부랑 할머니도 마음은 늘 소녀지요.하물며 꽃에 반해 일생을 꽃 속에서 사시는 은주님이사 꽃처녀지요.육신이야 어찌해 볼 수 있으리까만 가슴안에 있는 마음이사 자신의 정신연령이겠지요.싱그러운 소녀처자가 쓴 야생화 수필 잘 읽었습니다.내 마음도 화사하고 푸르러지네요.

김제민님의 댓글

김제민 작성일

  와~ 드댜 은주님의 글솜씨가...그래서 늘 마음은 이팔청춘이라 하나봐요~ 항상 스무살 소녀같은 맘으로 사시면서 꽃과 함께 즐겁고 행복하십시오~^^

김은주님의 댓글

김은주 작성일

  부족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써야하는데 재산이 그뿐이라... 금아님의 제목을 보니 저의 가을병이 생각이 나서 올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또 나이를 먹어갑니다만 오는 가을 행복한 추억 많이 만드시고 오늘도 좋으날 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