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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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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이재 댓글 8건 조회 825회 작성일 05-08-1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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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날보다 10분쯤 앞당겨 출근을 했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한바탕 땀 흘린 후의 티 타임 09:30,
2층으로부터 소포가 배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흰 서류봉투에 또박또박 예쁘게 적힌 수신자를
확인하자 마자, 보내준 이의 마음에 콧등이 시큰해지더니 금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개봉하는 손끝이 떨려오고  봉투를 열자 낯익은 이름들이 황금빛으로 쏟아지며 환히 웃는다.
게으르다 못해 아예 늘어져버린 나를 곧추세우라는 듯, 전해진 것은 동인지 한 권.
그대가 너무 고맙고 예뻐서 유치찬란한 엽서 한 쪽을 띄운다.

  『잘못했습니다.
  반성하는 중이어요.

  다시 출발선에서 첫 발을 딛고 일어서기엔 너무 먼 길을 되돌려야 하겠기에  처음으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사랑 안에서 당신의 이해와 용서를 구하며...

  마음에 꽂히는 글 한 줄을 오늘 만났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는 것
  당신이 떠올랐지요.
  매양 그러하듯이 댓잎 흔들리는 미약한 바람결에도 나는 당신을 느끼며, 보고 듣습니다.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당신에겐 사소한 일일 것이나, 전해질 때까지의 설렘과 기다림에
  대한 초조한 마음을 알겠기에 내게는 허투루 다룰 수 있는 사소함이 아니란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존재에 대한 의미와 삶의 연속성에 놓인 가치까지
  -내겐 소중한 인연이랄 밖에요.

  차도를 가르고 인도를 걸으며 스치듯 지나쳤을지도 모르고, 푸른 숲에 들기 위한 한적한 오솔길
  그 도랑 옆이나 코발트빛 물결이 바람따라 몰려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어느 바닷가의 부드러운 모래톱,
  패이다 덮어지는 흔적들 사이로 한번쯤 눈인사 나누었을지도 모를 그대와 나,   
  계획된 이벤트는 뒤로하고 불현듯 한 만남을 꿈꾸며 챙 넓은 모자를 살짝 고쳐씁니다.

  햇살을 따라 도는 해바라기는 마음을 높이기 위한 키였을 것입니다. 』

8월은 열기가 절정에 도달하는 달이기도 하다. 그 뜨거움은 쭉정이와 알곡을 가르는 심판자가 되기도 하고
따끔한 일침을 놓는 것은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엄격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땡볕의 그 숨막히는 질주 속에서도 피곤한 시선을 기대어 쉴 수 있었던 것은 한-낮 바람을 거느린
소나기 떼와 깊은 밤에는 빛나는 별과 지칠 줄 모르고 노래하는 매미의 우렁찬 울음이 있어서일 게다.

이 여름이 지나면 한 해를 수확해야 하는 가을이 온다. 농부는 봄에 뿌린 씨앗을 땅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추수를 하겠지만,
씨 뿌릴 땅이 없는 나는 지난 봄날 무엇을 뿌렸었던가.
여름과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사색을 키우리라 곱씹었지만 언제나 마음만 가득할 뿐 녹록한 때는 없었다.

키보다 높이 솟은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촘촘히 박힌 씨앗들에게 놀라워했던 유년의 기억들은 어느 덧 아스라한 옛 일이 되었는가.
그 꿈은 키보다 높은 핑계의 봉분으로만 남길 것인가...?
하늘은 저렇게 맑고 아직은 푸르른데...!


댓글목록

이양섭님의 댓글

이양섭 작성일

  이재님의 글을 읽는 동안 벌써 마음이 풍성~~~~해지는 느낌.하늘은 저렇게 맑고 아직은 푸르른데.... 그 꿈은 .... 마음속 깊은 곳을 흔드는 이재님의 글.... 참으로 아름답고 푸르름이 넘칩니다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꿈은 꾸는 자의 것이고, 뿌린대로 거두리라. 한고개 허덕이며 넘으면 다시 다가오는 고갯마루 넘으며 씻어내던 땀은 무엇이었으며, 왜 나는 구슬땀을 흘리며 등성이를 넘고 또 넘었는고 !! 키 큰 해바라기 보다 더 목을 늘여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어인 연유인지.....뉘엿거리며 붉어져가는 하늘에 내 모습을 살며시 감춰보는 마음은 또 어인 까닭인지...삶이 나를 속여도 성내지 않으려 애썼건마는 넘고넘은 고개를 지나와 다시 커다란 고개를 만나 허우적이는 꼬라지는 또 뭐란 말인가.허나 오늘도 뚜벅뚜벅 걸으며 무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동인지라시니 궁금하군요.글솜씨로 봐서는 혹시 문학 쪽이 아닐까 하는 짐작은 맞을  듯 한데.....

정윤영님의 댓글

정윤영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벌써 바람의 냄새가 달라진 듯하더군요.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비올라의 선율, 피카소의 색채...♬~가을을 노래한 가사 일부분입니다. 아직 가을이란 말을 하고 싶지 않은데, '가을'은 자꾸 혀끝에서 구릅니다./이길영선생님...! 문학이라니 언감생심요. 늘 그렇듯, 박수부대입니다.*^-^*

우정호님의 댓글

우정호 작성일

  너무 좋은데요

김성대님의 댓글

김성대 작성일

  글에서 가을바람의 상큼함을 느낍니다. 덕분에 기분좋은 하루를 시작합니다.^^

박광일님의 댓글

박광일 작성일

  가을을 노래하는 글로 해바라기를 택하셨군요. 쓰여짐에 감사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