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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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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윤영 댓글 4건 조회 992회 작성일 06-01-2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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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당매(政堂梅) - 매화나무/'장미과'
  • PICT7733.jpg <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매화나무로는 경남 산청 단성면 운리 단속사(斷俗寺) 터의 정당매(政堂梅)를 들 수 있습니다. 지리산 줄기의 힘찬 정맥을 이어받고 홀로 오랜 세월을 버텨온 정당매는 이 마을 출신인 고려 말기의 문신인 통정공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 어린 시절, 바로 이 단속사에서 글공부를 할 때 심은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PICT7738.jpg 강회백은 고려 우왕 2년(1376) 문과에 급제한 뒤 나중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벼슬) 겸 대사헌에까지 이르는데, 매화는 그 이전에 심은 것으로 보아야 하니, 대체로 6백30살이 넘었다 할 것입니다. 지금은 석탑만 남아 한때 이곳이 절집이 있던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는 단속사터의 정당매는 절집의 이름처럼 세속과의 인연을 끊은 채, 그야말로 선계(仙界)에 은둔한 매화의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매화나무였습니다. PICT7736.jpg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당매는 가지를 넓게 펼치고 꽃도 화려하게 피웠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뒤로 이제 그 수명을 다한 듯, 아슬아슬하게 목숨만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원줄기는 이미 부러져나가고 죽어서 시멘트로 옛 줄기의 형상을 해두었고, 겨우 주변의 가느다란 가지 두엇만이 남아있습니다. 세상과의 연을 끊고 이곳 절집에서 그윽한 향을 품던 정당매는 사라진 절집의 운명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야 할 때를 맞이한 셈입니다. 건강했을 때 키가 3m까지 됐다는 정당매의 화려한 이미지는 이제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저 그림이나 옛 자료 사진에서나 그 아름다운 자태를 확인하는 수밖에요. PICT7735.jpg 정당매를 잘 보존하려는 강회백의 후손들이 1915년 정당매 옆에 세운 정당매각(政堂梅閣)만이 이 나무의 한때 영화를 쓸쓸히 지키고 있습니다. 정당매는 우리나라의 숱하게 많은 매화나무 가운데 유일하게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로, 현재 강회백 선생의 19대 손인 강낙중 씨가 관리자로 돼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이 매화나무는 이제 제 명을 다한 채, 앙상하게 남았지만 여전히 우리네 가슴속에, 추운 겨울을 올곧게 버티어내는 참 선비의 정신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입니다. * 단속사터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단속사터에 들른 사명당에게 준 시가 씌어 있는 '남명선생시비'가 서 있습니다. 花落槽淵石 - 돌로 된 물 홈통 위에 꽃잎 떨어지고, 春深古寺臺 - 옛 절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別詩勤記取 -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 靑子政堂梅 - 정당매(政堂梅) 푸른 열매 맺었나니. 남명 조식은 그의 나이 예순에 지리산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 일흔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벼슬에 나서지 않고 산림처사로 묻혀 살았으나 그의 기개는 시퍼렇게 선 칼날이었습니다. 열일곱의 나이에 승과에 급제하고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명산대천을 떠돌던 사명당과 남명의 만남은 요즘말로 '코드'가 딱 맞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찾은 범같이 용맹한 장부의 상을 가진 사명당이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남명은 사명당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길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명은 그 짧은 만남과 자신의 가르침을 사명당이 잊지 않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 조식 (曺植 1501∼1572 / 연산군 7∼선조 5) 조선 중기 학자. 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冥). 본관은 창녕(昌寧). 어려서부터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섭렵하고 천문·지리·의약·병략 등에 널리 통했으며, 또한 좌구명·유종원의 문장과 노장학(老莊學)에 심취,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25세 때 《성리대전》을 처음 읽고 크게 깨우친 바 있어 이후로 유학에만 힘써 대학자로 추앙받았다. 그의 학문목표는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중종 때부터 명종·선조 때까지 삼조(三朝)에 걸쳐 그에게 여러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덕천동에서 선비를 모아 강학에 힘쓰는 등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문하에서 오건·김우옹·정구·정인홍·최영경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며, 그의 문인들은 스승의 기상과 학풍에 영향을 받아 대체로 은일적인 학풍을 지녔고 특히 절의(節義)를 중시하였다. 그의 제자 가운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운 사람이 60여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정인홍·곽재우·김면 등은 3대 의병장으로 꼽힌다.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명집》 《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

댓글목록

한미순님의 댓글

한미순 작성일

  감사 드립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매화나무에 보호수가 있는줄 몰랐군요.진주에 근무하면서 자주 지리산을 다니면서 대원사 가는 중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덕천서원과 단속사 터에 가볼 수 있었을텐데 가보지 못했군요. 정당매가 천명을 다해가고 있다니 아쉬움이 크군요.후손이라도 잘 자라고 있다면 다행이련만.....

김종건님의 댓글

김종건 작성일

  매화도 오래 사는군요. 인간 수명이 나무에 비하면 찰나입니다.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봄이 아직 동구밖에서 뭉그적댈 즈음, 짙은 향기로 피어 절터 가득 날렸을 꽃비(梅雨)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황홀한 지경이었을까요...? 생각만으로도 명치끝이 아릿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