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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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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명자 댓글 4건 조회 2,321회 작성일 07-12-0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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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몇 가지 일을 해결할 요량으로
엄니와 함께 할 시간을 비워 두었습니다.
오랜만에 마당에 나가니  아침 풍경이 낯설기 조차 하네요. 

아랫채 처마 옆 푸석거리는 화분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 줍니다.

마당 한 켠에 가는잎꽃향유가 하얗게 박제된 모습으로
보라색 가을을 전설로만 추억하고,
가는잎산들깨는 가을 볕에 아직 미련 남아
빈 깍정이에 남은 가난한 허브 향으로 가슴앓이 하고 있네요.

꽃밭이랄 것도 없는 잡초들 무성했던 마당에는
그 화려했던 계절의 흔적만 남아서
빗질하지 않은 여인의 머리처럼 어설픕니다.

그 사이 용담은 꽃봉오리를 단 채로 말라 있고,
민백미는 벌써 씨앗을 멀리 날려 버리고
박주가리 열매처럼 요람 껍질만 남아 휑하니 서글퍼 집니다.
뒤늦게 어수리가 푸른 이파리 손바닥처럼 펼치고 애처롭게 서리 맞으며
보는 이의 마음을 시리게 하네요.

제주 여행에서 따라 온 말똥비름도 푸르딩딩 얼어 있고,
어설픈 솜씨로 얹어 놓은 몇 개의 기왓장 분도 달이 넘도록
관심 가져주지 않은 주인 덕분에 몰골이 말이 아니네요.
그나마 마삭줄은 빨간 잎을 매달고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녀석을 그냥 두어도 괜찮을런지 걱정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물바가지를 들고 마당가에 서성거려 봅니다.
무에 그리 바빴었는지 가을이 다 가도록 꽃밭에 눈 길 보냈던 기억이 가물합니다.

벌써 봄맞이꽃 월동 싹이 빨갛게 동면에 들어가고 있고,
개불알풀 어린 싹도 하얗게 서리를 덮어 쓰고 있습니다.
수도 가에 제법 어우러져 있던 개불알풀 싹은
부지런하신 엄니 손끝에 거의 뽑혀 버리고
어린 몇 포기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네요.
그래도 내년 봄에 푸른 꽃송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싹이 새로 돋을 리야 없겠지만 겨울 가뭄은 면해야 하겠기에
말라서 푸석이는 화분에 조심스레 물을 부어 줍니다.
마른 목 축이듯이 금방 잦아드는 물기를 보니 어지간히도 속이 탔나 봅니다.

어느 씨앗이 거기 떨어져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는지 모르니까.
아무 것도 없는 빈 분에도 공양하듯이 한 모금씩 물을 부어 줍니다.

마루 구석에 있던 모종삽을 찾아 들고 금낭화가 심겨져 있는 쪽으로 가 봅니다.
꽃밭의 흙을 제끼니 아직 땅이 얼지 않아서 쉽게 뒤집어집니다.
 
금방 목욕하고 웬 흙장난이냐고 핀잔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아직 파랗게 살아 있는 종지나물을 어린 것 큰 것 가리지 않고 뽑아냅니다.
모종삽 날 끝에 둥굴레 뿌리인지, 마 뿌리인지 걸리는 느낌이 조심스러워서
제대로 삽질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제비꽃 종류를 잘못 들여 놓았다가는 감당을 못할 정도로 퍼져서 도배를 해 버립니다.
종지나물은 올 봄 그렇게 캐내었는데도 용케도 남아 있네요. 한참 뽑아야 할 거 같습니다..
다시는 들여 놓지 않을 거라고 해 보지만 지난 여름에 또
알록제비 동그란 잎이 예뻐서 두 포기 얻어들이지 않았답니까요.
아무튼 이 고질병인 꽃 상사병은 고칠 약도 없슴다.

뿌리줄기로 퍼지는 녀석들도 지 멋대로 퍼져나가서 감당이 안 됩니다.
녀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벌써 도배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
꽃범의꼬리도 조만간 처리를 해야겠습니다.

담 섶 바닥에는 참마 살눈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네요.
내년에는 꽃밭이 마밭으로 변하는 건 아닐런지.... 하기사 꽃밭이랄 것도 없지만.

모처럼 한가한 휴일 아침, 아쉬운 대로 가을걷이를 하였습니다.
몇 시간의 소일 덕분에 가을의 배설물로 남겨진
풍선덩굴, 가는잎꽃향유, 가는잎산들깨 종자를 조금 챙겼습니다.
내일은 씨앗을 어디에 뿌려줄지 둑방을 어정거려 봐야겠지요. 

댓글목록

전경녕님의 댓글

전경녕 작성일

  가는잎꽃향유는 떨어지는 씨만으로 충분히 번식이 됩니다.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있군요, 안 고쳐도 좋을 상사병...ㅎㅎ~ 날이 많이 차갑습니다. 건강도 잘 살피셔요~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고질병인 꽃상사병이 준 아름답지만 아쉬움을 안고오는 긴장이 조금은 가벼워졌을지도 모르는 가을걷이를 했군요.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봄부터 고운 모습을 보여주던 흔적들을 정리하면서 이걸 꼭 정리해야 하는지 멈칫거리곤 합니다.그래도 너무 어수선한 모습이 걸려 흔적들을 정리하면서 돌아올 봄에 만날 모습들을 그려보지요.꽃범의꼬리가 주변을 가득 채우지만 빈터가 많은 초막은 걱정하지 않지요.솎아서 여기저기 옮겨주기도 하고 오는 이들에게 몇 포기씩 선물도 줄 수 있으니까요.더한 건 매발톱들인데 솎아주지 않으면 밀도가 높아져 튼튼하게 자라지를 못하지요.내년엔 조금만 남겨 앞산 그루터기에 뿌려줄만큼만 남기고 씨앗이 익기 전에 잘라주어야겠습니다.

남명자님의 댓글

남명자 작성일

  매발톱이 너무 번져서 중간 중간 솎아서 분양을 했지요. 그래도 아직 많아서 더 정리해야할 거 같슴다. 꽃범의꼬리는 집앞 둑에다 옮겨 볼까 하는데요. 이웃집 어르신들이 제초제를 얼마나 뿌려대는지...아마 발붙이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