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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꽃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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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귀병 댓글 10건 조회 3,787회 작성일 04-01-1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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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여름밤의 꿈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강마을이고 산마을이며, 밤하늘 가득히 별빛이 쏟아지는 별빛마을일 뿐만 아니라 애절한 아리랑 가락이 가슴속 깊이 파고드는 아라리의 마을이기도 하다.  달빛이 아우라지강의 여울에 반사되어 수백, 수천의 달을 반짝이며 흘러갈 때 그 속에 잠긴 아라리의 여운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고향의 정취를 맡을 수 있으며, 산중턱 고개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평화로운 마을 풍경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포근함을 안겨주는 곳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에서 도시친구들과 함께 산굽이를 돌고 도는 정선선 기차를 타고 고향마을에 도착했을 때, 친구들은 ‘산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라고 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내 고향 여량은 북쪽에 상원산, 남쪽에 고양산, 서쪽에 가리왕산, 동쪽에 왕재산, 그리고 국내 최대의 철쭉이 자생하는 반륜산 등 사방이 태백준령의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이다.  한편, 유홍준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 에서 여량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여량은 강마을이다. 오대산 줄기인 발왕산에서 발원하여 노추산을 굽이굽이 맴돌아 구절리 갓거리로 흘러내린 송천과 태백산 줄기인 삼척 둥근산에서 발원하여 임계면을 두루 돌면서 구미정의 그윽한 승경을 이루고 반천을 거쳐 유유히 내려오는 골지천이 여량에 와서 합수된다.  두 물줄기가 아우러진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 아우라지강이다.  그 이름은 또 얼마나 예쁜가.  강은 별로 크지 않으나 모래밭은 사뭇 넓고 길어 마주 보이는 산들이 제법 멀어 보이고 강가에는 희고 검은 천석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여름은 강변 따라 무리 지은 조팝나무 꽃이 흰 눈을 내리듯 흩뿌려지고 이어서 진한 찔레꽃 향기가 강물을 취하게 하면서 시작된다.  이때쯤부터 투명하도록 맑은 강바닥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다슬기 줍던 재미, 물보다 물고기가 더 많았던 강에는 고기 잡는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바위틈에 손만 넣으면 잡히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강가에 자라는 풀을 뜯어다 찧어서 강물에 풀면, 작은고기가 비실거리며 물가로 나올 때 움켜잡던 재미. 그 풀이 ‘여뀌’였으며 그 종류도 여뀌, 흰꽃여뀌, 개여뀌, 산여뀌, 털여뀌, 가시여뀌, 기생여뀌, 이삭여뀌, 장대여뀌, 끈끈이여뀌 뿐만 아니라 이와 비슷한 여뀌바늘, 노인장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요즈음에서야 알았다.  손에 상처라도 생겨 피가 나면 어디서 들었던지 강둑에 납작 엎드려 자라던 풀 줄기에서 나오는 흰즙액을 상처에 발랐었고, 강변에 자라는 나비모양의 앙증맞은 흰색 꽃이 모양은 비슷한데 땅콩처럼 자갈밭을 기어가는 것, 싸리나무처럼 줄기가 곧은 것의 이름도 그 때는 몰랐었는데, 그 흰즙액이 나오는 풀이 ‘땅빈대’, 기는 줄기의 풀은 ‘괭이싸리’, 줄기가 곧은 것은 ‘비수리’이며, 지천으로 깔린 노란색 꽃이 ‘물싸리’였다는 것을 최근에 야생화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올 때 길가의 오이풀을 뜯어 손바닥에 탁탁 친 다음 코끝에 가져다 대면 풍기는 풋풋한 오이냄새로 물고기잡이에 지친 허기를 달래던 추억,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 잽싸게 먼저 가서 길가의 풀(그령)을 묶어 올가미를 만들어 뒤 따라 오던 친구들이 한눈 팔다 걸려 넘어지기를 장난치던 악동시절, 그 때가 마냥 그립기만 하다.

                아우라지의 여름

나른한 여름날 오후에
갈금마을 포플러 나무 그늘에서 꾸벅 졸던 산새는
‘풍덩’하고 아우라지 강에서 멱감는 아이들 소리에
화들짝 놀라 포로롱 하늘을 날고

새하얀 조약돌, 고운 모래 맑게 비추이는 아우라지 강에서
피라미, 갈겨니는 은비늘 반짝이며 유유히 헤엄치고
꼬리 긴 다슬기가 구불구불 흔적을 남기고 있을 때
문득 강물에 비친 웃음 띤 환한 얼굴들.

소쿠리에 잘 익은 옥수수, 푸짐한 감자 가득 채워
도란도란 이야기 꽃속에 여름 밤은 깊어만 가고
하늘을 가득히 메운 별빛이 아우라지 강물을 향해 쏟아질 때
호박꽃 초롱 삼은 반딧불이는 지나는 길손을 반기고 있네.

길손아, 옥수수랑 감자랑 함께 나눠 먹으며
우리 살아가는 이야기로 밤을 새운들 어떠리.
인정이 살아 숨쉬는 우리들의 고향이야기를
우리 어릴 적의 순박한 이야기들을.  (2002. 7. 5)

  여름이면 숲속에는 밤사이 별빛을 듬뿍 받은 온갖 생명들이 활발한 활동력을 과시하며 자라고 번식한다. 먼산에서 산꼬리풀이 꼬리를 흔들기 시작하면 이에 호응하여 범꼬리, 호범꼬리, 냉초, 그리고 까치수영, 촛대승마 마저 꼬리를 흔들어 온 산이 술렁거릴 때 배초향, 향유는 산등성이 풀밭에서 실려 온 원추리 냄새와 함께 어울려 진하디 진한 꽃 향기를 골짜기에 가득 메워 온갖 나비와 벌들을 불러 모은다.  숲 그늘에는 풀인양 꽃인양 청초한 자태를 보이는 은대난초, 갈매기난초, 나비난초, 제비난, 방울새난, 병아리난, 애기사철란, 나도잠자리난, 나리난초, 옥잠난초, 닭의난초가 난원에 들어선 것처럼 그윽한 풀향기를 내뿜는다.  들판에서는 ‘리리 릿자로 끝나는 말은~ ♪’노랫말 따라 참나리, 말나리, 중나리, 솔나리, 털중나리 그리고 파란하늘이 부끄러운 땅나리, 주홍색 화색이 선명한 하늘나리, 하늘말나리, 날개 달린 날개하늘나리, 그리고 숲에 둥지를 튼 뻐꾹나리 마저 긴긴 여름 낮을 화려하게 물들인다.

깊은 산에는 봄철의 어린 순은 사라지고 벌개미취를 선두로 참취, 곰취, 개미취, 좀개미취, 미역취, 각시취, 분취, 단풍취, 서덜취 그리고 부싯깃으로 쓰던 수리취 등이 취한 듯 건망인 듯 꽃망울을 올려 가을 채비를 서두르고, 습한 골짜기 곳곳에는 궁궁이, 강활, 어수리, 누룩치, 왜당귀, 구릿대, 개회향 등이 흰색의 고만고만한 모양으로 헷갈리다 못해 하나로 보이게 한다. 정말 미나리과 애들은 골치 아프다.  헷갈리는 애들은 또 있다. 콩팥이야 신체의 일부이니 직접 볼 수 없으나 잎사귀는 신장형(콩팥형)이 있어 콩팥모양을 미루어 알 수 있고, 콩 내놔라, 팥 내놔라 온갖 참견 다하는 오지랖 넓은 이도 있어 콩, 팥이야 ‘쉽사리’ 구분할 수 있지만 들판에 자라는 돌콩, 새콩, 그리고 여우콩, 여우팥은 도감을 펼쳐 보지 않고 어이 쉽게 구별하겠는가?  꽃과 잎사귀로는 더덕과 만삼을 분간하기 어려운 맥문동, 천문동에서 물레나물이 덜거덕거리며 물레를 돌릴 때, 우산나물을 삿갓으로 쓴 ‘까마중’이 산솜방망이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면 빛나는 중대가리풀, 대가리에 이어지는 세대가리, 파대가리, 방동사니대가리, 내 대가리, 네 대가리…        아,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싯개, 며느리배꼽… 이땅에 태어난 며느리들의 한을 풀 이름에게도 이렇게 붙였구나!

  뻐꾸기 울음 따라서 봄이 가면 우리집 뜨락에는 바위취가 호랑이 귀모양의 꽃잎을 흩뿌리면서 여름을 맞이한다.  고고한 부채붓꽃이 선비의 기품을 자랑하고, 나무 밑에는 금강초롱, 도라지 모싯대, 우산나물, 그리고 천남성이 장과를 올려 자리 잡고 있다.  울타리 따라 핀 분홍색의 끈끈이대나물에 이어서 벌개미취 무리가 일찌감치 꽃을 피운다.  심심산천이 아님에도 뭇사람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도라지는 아마도 흰색꽃이 피면 뿌리도 흰색도라지, 자주색꽃이 피면 뿌리도 자주색도라지(?) 일테지.  참나리가 여름의 전령임을 자처할 때 애잔한 모양의 하늘나리가 진홍빛 피를 토하고 말나리, 하늘말나리, 솔나리가 시선을 잡는다. 진보라색 자주꽃망망이가 훤출한 키를 자랑하면 이에 질세라 금꿩의다리가 키재기로 다가서고, 그 밑에서 연잎꿩의다리, 두메양귀비, 분홍바늘꽃은 영역을 지키느라 안간 힘을 쓰고 있으며,  꽃봉오리가 한 쌍의 오리 처럼 마주 보고 있는 흰진범이 희귀함을 자랑하고 있다.
 봄철의 자란, 금새우난, 감자란에 이어 병아리난이 모습을 나타내고 긴 타래를 틀어 올라간 듯한 타래난, 범부채, 애기범부채, 왕성하게 뻗은 뿌리로 텃밭을 장악한 초롱꽃, 상체가 무거워 주체 못하는 연주황색 동자꽃, 연미복 꼬리를 연상케 하는 제비동자꽃, 무리 지어 피어야 제 맛인 꼬리풀, 노루오줌, 꽃범의꼬리, 부처꽃, 잎사귀가 톱날 같은 모양의 톱풀, 꿩의 비름, 철쭉을 올라 타고 화려한 자태를 보이는 큰꽃으아리, 울타리를 감아 호롱불을 밝힌 더덕꽃, 기품 있게 산마루에 올라 앉은 듯한 잔대와 큰제비꼬깔, 술패랭이를 비롯한 석죽과 패랭이 무리들이 앞 다투어 피고 진다.  그리고 노랑색 고추나물, 그 고추 먹고 맴맴….

매앰~ 매앰~ 시원한 매미소리에 여름은 한창 무르익고, 한여름 밤의 별빛과 새벽이슬을 머금은 풀꽃들은 태양이 뜨면 자신을 불살라 새로운 생명을 퍼트려 나간다. 내년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4. 갈대의 노래
   

댓글목록

송정섭님의 댓글

송정섭 작성일

  햐아~ 점입가경입니다. 어느해 늦여름인가 아우라지 강둑에서 가족들과 야영하며 벌벌 떨었던 기억도 나고, 강 건너편에 실어다 주셨던 나룻배 아저씨도 생각나는군요~, 김귀병님은 참 소중한 어릴적 기억들을 잘 갖고 계시는군요~

윤영미님의 댓글

윤영미 작성일

  글을 읽다보면, 가슴이 아려옵니다.다시 돌아갈수만있다면..다시 한번만 이라도 구절초꽃을 한아름꺽어 내엄마에게 불쑥내밀던 유년시절로 되돌아갈수만 있다면..김귀병님의 유년의추억에 저도 무임승차좀 하겠읍니다.

이양섭님의 댓글

이양섭 작성일

  드디어 여름이야기를 듣게되는군요  아직 퇴근 안하셨나요? 지금 눈이 오고있거든요^ ^~~

김은주님의 댓글

김은주 작성일

  꽃박사님의 경지에서 질펀하게 놀아본 꽃놀이를 한달음에 오르고 내려와 이제는 행복함으로 기뿜이 넘쳐납니다. 그 어떤 수채화보다도 아름다운 아우라지의 꽃이야기에 취해 어서 다시 봄이오고 여름이 오기를 바람니다. 고운꽃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름다운 갈대의 노래도 기다립니다~

이태규님의 댓글

이태규 작성일

  김귀병님 유년의 추억!! 다음 세대에게 그냥 넘겨주기엔 너무 아쉬움이 남을것 같아 올 여름 배낭메고 텐트와 코펠 그리고 먹을거 고루고루 챙겨 유년의 세월로 떠나기로 맘 먹었습니다..

이영태님의 댓글

이영태 작성일

  단숨에 읽어내려왔어요. 가을이 기다려져요.문득 "아우라지로 가는길"이 떠오르네요.

신흥균님의 댓글

신흥균 작성일

  동화속으로....어린시절로....근데~ 왜 내겐 많은 들꽃을 봤던 기억만 나지 그들의 이름이 뭔지가 지금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져 들꽃들만 봤던 기억이 아스름합니다. 같지야 않겠지만 태규님 따라서 나도 김귀병님의 동화속으로 한번 발길을 옮겨 볼랍니다.

우정호님의 댓글

우정호 작성일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야생화와 같이 지내야 이런 글이 나오나요 감탄에 감탄입니다.

김귀병님의 댓글

김귀병 작성일

  모처럼 눈이 내립니다. 눈이 오고 기온이 떨어져 삼라만상이 얼어 붙는 것 처럼 보여도 생명들은 잉태되어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송보송한 솜털로 외피를 두텁게 걸친 버들가지도 꽃망울 속에 노란 수술들을 잔뜩 움크리고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그 가지에 물이 오르면 버들피리 만들어 불던 시절이 있었지요. 닐리리리~  .  올 봄에는 시간이 날 것 같습니다.  고운님 들과 함께 열심히 고행(탐사) 할렵니다. 

화수진님의 댓글

화수진 작성일

  아~ 너무 낭만적이시다..김귀병님은...